톰 왓슨의 비극은 여의도에서 반복되는가?
정치인이 대중의 사랑에 중독될 때, 그 사랑은 곧 증오의 무기가 된다
19세기 말 미국, 톰 왓슨(Tom Watson)은 흑인과 백인 빈농의 손을 맞잡게 했던 ‘통합의 리더’였다.
그러나 권력의 문턱에서 좌절한 그가 마지막으로 붙잡은 줄은 다름 아닌 백인 우월주의 팬덤 정치 였다.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이들을 위해 흑인, 유대인, 가톨릭을 제물로 삼았던 왓슨의 말년은 팬덤 정치 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어두운 종착역을 보여주었다.
그로부터 130년이 지난 2025년 12월 18일, 대한민국 여의도에는 다시 톰 왓슨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정치는 합리적 설득 대신 ‘팬덤 결집’과 ‘타자 배제’라는 가장 손쉬운 팬덤 정치라는 생존 전략에 매몰되어 있다.
팬덤 정치 의 연료가 된 ‘갈라치기’: 이준석의 위험한 선택
오늘 이준석 의원이 보여준 공격적인 행보는 팬덤 정치의 핵심 동력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톰 왓슨이 초기 농민 연대의 실패 후 ‘가장 결집력이 강한 집단’을 선택해 그들의 분노를 대변했듯, 이준석 또한 세대와 젠더라는 휘발성 강한 소재로 팬덤을 구축했다.
그의 ‘통일교 특검’ 제안이나 자극적인 여론전은 정책적 대안이라기보다, 자신을 추종하는 ‘전투적 팬덤’에게 던져주는 먹잇감에 가깝다.
왓슨이 혐오를 동원해 권력을 유지했듯, 이준석의 정치 역시 갈등을 먹고 자라는 팬덤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당원 주권’이라는 가면을 쓴 팬덤의 독주: 정청래의 굴레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당대표의 오늘 행보는 팬덤 정치가 어떻게 당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인 1표제’ 부결에 대해 열성 당원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정치인이 대중 전체가 아닌 ‘강성 팬덤의 대리인’으로 전락했음을 시사한다.
왓슨이 “나를 지지하지 않는 자는 인민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던 것처럼, 특정 팬덤의 목소리만을 ‘진정한 민의’로 포장하는 행태는 스윙보터와 중도층의 소외를 가속화한다.
팬덤에 갇힌 정치는 결국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보편적 상식을 잃어버리게 된다.
팬덤 뒤에 숨은 진영 논리: 장동혁과 기득권의 생존술
국민의힘 장동혁 의원이 보여주는 선명한 진영 논리는 팬덤 정치의 또 다른 단면이다.
상대 진영을 대화의 파트너가 아닌 ‘궤멸시켜야 할 적’으로 규정할 때 팬덤은 가장 강력하게 결집하기 때문이다.
장 의원이 계엄 관련 발언 등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는 배경에는, 합리적 비판을 하는 중도층보다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우파 팬덤의 결속이 당선과 생존에 더 유리하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이는 톰 왓슨이 양당 체제의 높은 벽을 넘기 위해 결국 극단적인 선동가로 변신했던 씁쓸한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결론: 스윙보터의 시대는 끝났는가?
톰 왓슨은 한때 “가난은 인종을 가리지 않는다”고 외쳤다.
그러나 팬덤의 수장이 된 후의 그는 “나의 백인 형제들이여, 흑인을 증오하라”고 속삭였다.
현재 한국 정치에서 나타나는 ‘팬덤 정치의 고착화’는 정치인들에게 ‘통합’보다는 ‘분열’이, ‘합리’보다는 ‘선동’이 더 남는 장사라는 확신을 심어주고 있다.
이낙연, 손학규의 소멸은 ‘팬덤 없는 정치’의 비참한 최후로 해석되고 있으며, 그 빈자리를 자극적인 갈라치기가 채우고 있다.
결국 이 비극적인 순환을 끊을 수 있는 것은 팬덤의 소음 속에서도 냉정하게 ‘효능감’을 따지는 스윙보터들의 침묵하지 않는 투표뿐이다.
정치가 팬덤의 노예가 될 때, 그 정치는 톰 왓슨이 그랬듯 결국 자신들이 지키려 했던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