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균 기자
최근 국내외에서 스테이블코인(stablecoin)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미국과 유럽 주요국은 이미 법제화 논의를 진척시키고 있으며, 한국 역시 국회와 금융당국, 산업계, 학계가 첨예한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그 중심에는 ‘대기업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경우 금산분리(금융과 산업자본의 분리) 원칙을 위반하는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다.
금산분리는 한국 금융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원칙이다. 1982년 제도 도입 이후 산업자본이 은행을 지배하면서 예금을 유용하거나 대주주 이익을 위해 금융을 남용하는 폐해를 막는 것을 목표로 유지돼 왔다. 하지만 블록체인과 암호자산, 그리고 스테이블코인이라는 새로운 금융 인프라가 등장하면서 이 원칙은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한국은행 “대기업 스테이블코인 발행, 금산분리 위반 소지”
한국은행은 비은행권, 특히 대기업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경우 사실상 예금 수신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금산분리 위반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스테이블코인이란 달러·원화 등 법정화폐에 가치를 고정해 가격 변동성을 최소화한 디지털 토큰으로, 주로 결제와 송금에 활용된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최근 국회 보고에서 “스테이블코인을 민간 기업이 발행하게 되면 사실상 은행법과 전자금융거래법의 규제를 우회한 수신기능이 허용되는 것과 같다”며 “이는 금산분리 원칙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은행 중심의 금융시스템을 고려할 때, 스테이블코인은 은행이 먼저 시범적으로 도입하고, 이후 단계적으로 확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금융당국 내부에서도 비슷한 기류가 강하다. 한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대기업이 막대한 자본력과 시장 지배력을 바탕으로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면, 사실상 금융업에 진출하는 효과를 낳는다”며 “이는 산업자본의 금융지배를 금지한 금산분리 취지에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설명했다.
한국은행이 경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의 관계 때문이다. 현재 한국은행은 원화를 기반으로 한 CBDC 파일럿을 준비 중인데, 민간 스테이블코인이 먼저 확산되면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전파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한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CBDC가 본격 도입되기도 전에 민간 스테이블코인이 대규모로 사용되면, 통화정책 효과가 왜곡되고 그림자 금융이 확대될 위험이 있다”며 “이는 금산분리 문제를 넘어 거시경제 관리 차원의 문제로 연결된다”고 설명했다.
“예금이 아니라 매매”…금산분리 적용 대상 아니라는 반론
그러나 학계에서는 다른 목소리도 나온다. 숭실대학교 윤민섭 교수는 “스테이블코인은 본질적으로 예금 수신이 아니라 매매의 개념에 가깝다”며 “발행자가 받은 자금은 준비자산으로 적립되며, 이를 통해 이용자가 언제든 동일 가치를 보장받는다. 따라서 예금을 흡수해 운용하는 은행과는 구조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한다.
윤 교수는 또 “금산분리 원칙은 산업자본이 은행 예금을 통해 사금고화하는 것을 방지하는 취지로 도입된 것”이라며 “스테이블코인은 기본적으로 고객 자산을 운용하지 않고 준비금으로 예치하기 때문에 동일선상에서 논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양대학교 강형구 교수 역시 “금산분리는 단순히 위반이냐 아니냐의 흑백논리가 아니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스펙트럼의 문제”라며 “한국이 글로벌 규제를 과도하게 적용하면 오히려 경쟁력에서 불리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특히 해외에서는 빅테크와 금융기관의 경계가 이미 허물어지고 있는데, 한국만 엄격한 금산분리 잣대를 들이대면 산업 발전에 제약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산업계는 스테이블코인 도입이 새로운 기회라고 본다. 대기업은 자체 생태계 내에서 스테이블코인을 결제·포인트·송금 수단으로 활용해 막대한 비용 절감을 기대한다. 예컨대 이커머스 플랫폼이 자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면 카드 수수료 부담을 줄이고, 글로벌 송금도 즉시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금융당국이 금산분리를 이유로 발행 자체를 제한한다면, 산업계는 혁신의 기회를 잃게 된다는 불만이 크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지금처럼 모든 것을 은행만 할 수 있게 묶어두면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며 “발행을 허용하되, 준비자산 비율이나 정보공시 같은 안전장치를 두는 방향이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해외는 어떻게 움직이나…규제 스펙트럼의 차이
국제적으로 스테이블코인 규제는 국가별로 큰 차이를 보인다. 미국에서는 페이스북(현 메타)이 추진했던 ‘리브라(Libra)’ 프로젝트가 정치권과 규제 당국의 거센 반발로 좌초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우려의 핵심은 글로벌 빅테크가 사실상 ‘민간 중앙은행’으로 기능하면서 금융안정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반면 유럽연합(EU)은 ‘미카(MiCA, Markets in Crypto-Assets Regulation)’라는 포괄적 법제를 마련해 발행 자격과 준비자산 요건, 투자자 보호 장치를 명확히 규정했다. 이 제도 아래에서는 은행뿐 아니라 일정 요건을 갖춘 기업도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다. 다만 발행 규모와 준비자산 비율, 공시 의무 등을 엄격히 관리해 금융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있다.
일본 역시 2023년부터 은행·신탁회사·자금이체업자만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도록 법제를 정비했다. 준비자산을 100% 보유해야 하며, 이용자의 환매권도 명문화했다. 한국은행이 “은행부터 발행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도 일본 사례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당국의 입장은…“은행부터 단계적 도입”
현재 국회와 금융당국은 ‘은행부터 발행을 허용하고, 이후 비은행으로 확대하는 단계적 접근’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는 일본과 유사한 접근법이다. 다만 국회 일부에서는 “산업자본의 금융 진출을 무조건 막을 게 아니라, 조건부로 허용해 경쟁을 촉진할 필요가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결국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논쟁은 금산분리 원칙을 단순히 위반이냐 아니냐로 결론낼 수 없는 복합적 문제다. 준비자산 보관 방식, 환매권 보장, 발행 주체의 자본력, 금융소비자 보호장치, 그리고 CBDC와의 관계 등 수많은 요소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암호화폐가 아니라 미래 금융 인프라의 핵심 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따라서 대기업 발행이 금산분리 위반인지 여부만 따지기보다는, 한국 금융질서 전체를 어떻게 재설계할 것인지가 더 중요한 질문이다.
금융당국은 금융안정을 이유로 은행 발행만 허용하려 하고, 산업계는 혁신을 이유로 대기업 발행을 주장한다. 학계는 양쪽의 논리를 모두 인정하면서도 과도한 규제가 경쟁력을 해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앞으로 국회 입법 과정과 금융당국의 규제 설계에 따라 한국의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혁신의 발판이 될 수도, 또 다른 규제 갈등의 장이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이 논쟁이 단순한 ‘가상화폐’ 논란을 넘어 금융과 산업, 국가경제 전반의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시험대라는 점이다.
1997년 금융감독구조 개혁을 앞두고 당국자들이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갈등의 시간을 가졌던 역사가 있다. 그 결론은 IMF외환위기였다. 금융의 중요성과 위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국자들이 이해관계자가 되었을 때 국가부도사태에 이를 수도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