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프리카 해안에 떠 있는 프레디 머큐리 의 고향 탄자니아 잔지바르(Zanzibar) 섬.
이곳은 ‘향신료의 섬’으로 알려져 있지만, 1946년 9월 5일, 이 섬의 수도 스톤 타운(Stone Town)에서는 훗날 전 세계를 뒤흔들 록 스타, 록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가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파로크 불싸라(Farrokh Bulsara).
파로크의 이야기는 단순한 출생 기록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의 지정학적 복잡성, 소수 민족의 정체성, 그리고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이 한 인간의 삶에 어떻게 파도처럼 밀려왔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역사서이다.
1. 잔지바르의 소년, 파로크 불싸라의 유년
프레디 머큐리가 태어난 탄자니아 잔지바르는 당시 영국의 보호령이었다.
그러나 섬의 역사적 뿌리는 오만 술탄국에 닿아 있었으며, 그 결과 아랍, 인도, 아프리카의 문화가 독특하게 뒤섞인 ‘스와힐리’ 문명의 중심지였다.
프레디 머큐리의 가족은 섬의 인구 다수와는 다른,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조로아스터교 신자인 파르시(Parsee)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주로 영국 식민 정부에서 고위직 공무원으로 일하며 경제적, 사회적 특권을 누렸던 소수 엘리트 계층이었다.
어린 파로크는 스톤 타운의 미로 같은 골목길을 누비며 자랐다.
햇볕에 바랜 산호석 건물들, 정교하게 조각된 짙은 나무 문들, 그리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정향과 계피, 후추 냄새.
이국적이고 매혹적인 이 환경은 그의 감수성을 형성하는 첫 번째 무대였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아들에게 영국식 최고의 교육을 시키고자 8세가 되자 그를 인도의 뭄바이 근처 보딩 스쿨(St. Peter’s School)로 보냈다.
인도 기숙학교에서의 삶은 파로크에게 음악적 자양분을 제공했다.
그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피아노를 배웠고, 서양 음악에 깊이 빠져들었다.
학교 친구들은 그의 성격이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과 자신감 넘치는 무대 매너를 발견했다.
이때부터 그는 ‘프레디’라는 별명을 쓰기 시작했다.
1964년, 프레디가 18세가 되어 잔지바르로 돌아왔을 때, 섬은 끓어오르는 정치적 혼란 속에 있었다.
아랍계와 인도계가 장악했던 기존 질서를 뒤엎고 아프리카계 주민들이 권력을 잡는 잔지바르 혁명이 발발한 것이다.
폭력이 난무했고, 파르시를 포함한 많은 소수 민족 엘리트들이 박해와 재산 몰수를 피해 서둘러 섬을 떠나야 했다.
파로크의 가족 역시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혁명을 피해 영국 런던으로 피신했다.
이 강제적인 이주는 한 소년의 삶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파로크는 자신의 고향, 자신의 배경, 그리고 심지어 본명까지도 지워버리려는 듯했다.
파로크 불싸라는 공식적으로 사라지고, ‘프레디 머큐리’가 탄생했다.
고향 잔지바르와 소수 민족 정체성이 그의 삶에서 의도적으로 지워진 침묵의 영역이 된 것은, 그 시절의 충격과 고통을 반영하는 역사적 단절이었다.
2. 연합 공화국 탄자니아: 복잡한 정치와 자치권의 균형
프레디 머큐리가 떠난 후 잔지바르는 본토의 탕가니카와 합쳐져 탄자니아 연합 공화국(United Republic of Tanzania)이 되었다.
탄자니아는 오랜 기간 사회주의적 정책과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해왔으며, 현재도 비교적 안정적인 다당제 민주주의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잔지바르 섬은 본토와는 다른, 독특한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잔지바르의 특별 자치권은 탄자니아 연합 체제의 핵심이면서도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다.
잔지바르는 독자적인 대통령과 정부, 의회를 가지고 있으며, 자체적으로 국내 문제(교육, 경찰, 보건 등)를 관할한다.
이는 연합 초기의 정치적 합의에 따른 결과이지만, 섬 내부에서는 자치권 확대를 넘어 아예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는 정치 세력과, 연합 체제 유지를 주장하는 세력 간의 긴장이 상존한다.
특히 잔지바르는 인구의 대다수가 무슬림(본토는 기독교와 무슬림이 비교적 균형)이라는 점에서 종교적, 문화적 정체성이 강하다.
이러한 정체성은 때때로 선거철마다 정치적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며, 평화로운 선거와 정권 이양이 잔지바르 정치의 핵심 과제로 남아있다.
현재 잔지바르는 관광 산업과 향신료 무역을 중심으로 경제 발전을 도모하고 있으며, 과거 노예 무역의 어두운 유산이 남아있는 스톤 타운은 이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3. 타이파 스타즈의 월드컵 도전: 끝나지 않은 꿈
잔지바르를 포함한 탄자니아 연합 공화국의 또 다른 역동적인 현장은 축구장에서 펼쳐진다.
탄자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일명 ‘타이파 스타즈(Taifa Stars)’의 이야기는 프레디 머큐리의 무대만큼이나 드라마틱하지만, 아직 ‘월드컵’이라는 최종 무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탄자니아는 아프리카 네이션스컵(AFCON)에는 간헐적으로 진출하며 지역 강호로서의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으나,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은 여전히 이들의 최대 염원이다.
2026년 FIFA 월드컵은 아프리카 대륙에 배정된 본선 티켓 수가 증가하면서 기회의 문이 넓어졌지만, 탄자니아에게 주어진 E조는 만만치 않았다.
탄자니아는 월드컵 예선에서 북아프리카의 강호 모로코, 그리고 잠비아, 니제르 등과 경쟁하며 힘든 여정을 펼쳤다.
특히 모로코는 탄자니아를 상대로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며 일찌감치 조 선두 자리를 굳혔다.
비록 타이파 스타즈가 예선 과정에서 승점(조 3위권)을 획득하며 탄자니아 축구 역사상 월드컵 예선 최고 성적 중 하나를 기록했지만, 결국 모로코가 본선 진출을 확정 지으면서 탄자니아의 2026 월드컵 본선행 꿈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월드컵 예선은 단순한 스포츠 경기를 넘어, 국경과 부족을 넘어선 국민적 통합의 장 역할을 한다.
잔지바르 출신 선수들 역시 탄자니아 대표팀의 일원으로 뛰며, 연합 공화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축구라는 언어로 표현한다.
4. 잔지바르 자치권 갈등, 연방 유지에 긴장 고조
잔지바르의 향신료 냄새와 런던의 록 음악, 그리고 탄자니아의 뜨거운 축구 열기는 서로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고향’과 ‘정체성’이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프레디 머큐리는 자신의 고향을 지웠지만, 그의 시작점인 잔지바르는 이제 그의 이야기를 관광 상품으로 만들며 복잡한 역사를 껴안고 있다.
그리고 탄자니아는 끊임없는 정치적 균형과 스포츠적 도전을 통해 그들만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최근 탄자니아 연합 공화국은 잔지바르 자치 정부와의 관계에서 다시 한번 정치적 시험대에 올랐다.
연방 정부와 잔지바르 사이의 오랜 논쟁거리였던 ‘자유왕래 및 경제적 불균형’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며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잔지바르 내부에서는 본토에 비해 해외 원조 및 투자 혜택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경제적 불만이 커지고 있으며, 공직 참여 기회의 불균형에 대한 소요 사태와 유혈 충돌 가능성이 정기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지난 10월 29일 탄자니아에서는 대선 및 총선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다레살람, 수도 도도마 등 주요 도시에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었고 총격, 방화 등 폭력적 소요사태로 악화되었다.
탄자니아 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인터넷 접속을 차단하고 대중교통 운행 중단, 도로 통제 및 통행금지 시행 등 강경한 조치를 실시하고 있다.
외교부도 1일 주탄자니아대사관과 본부-공관 합동 상황점검회의를 개최하여 탄자니아 교민 보호 방안을 논의했다.
잔지바르 국민들의 불만은 주로 연방 차원의 정치 무대에서 섬이 ‘과대 대표’되었다는 본토의 인식과, 실제로 섬 주민들이 느끼는 경제적 격차 및 소외감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된다.
정치 분석가들은 잔지바르가 독자적인 대통령과 정부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원적 행정 구조와 불투명한 자원 배분 문제가 연방 통합의 가장 큰 위협 요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탄자니아의 평화적 안정은 현재 진행형이며, 이 연합 공화국의 미래는 잔지바르의 정체성과 자치권을 얼마나 현명하게 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평가다.

잔지바르는 본토의 탕가니카와 합쳐져 탄자니아 연합 공화국(United Republic of Tanzania)이 되었다.
통합에는 혼돈의 시간이 존재하기 마련 , 그때 머큐리가 런던으로 이주하지 않고 잔지바르에 남았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