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심청 기자
국제결제은행(BIS) 산하 바젤은행감독위원회(BCBS)가 13일(현지 시간), 기후관련 금융위험에 대한 자발적 공시 프레임워크를 공식 발표했다. 이번 보고서는 2023년 11월에 공개된 초안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약 7개월 간의 의견수렴을 거쳐 최종안 형태로 정리되었다. 보고서는 ‘자발적 공시’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구성과 내용을 살펴보면 국제 공시 기준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번 프레임워크는 각국 금융당국이 자국 규제에 도입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열어두었지만, 공시 항목의 체계성과 구체성을 고려하면 사실상 글로벌 은행들의 실질적 의무사항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바젤위원회는 이번 공시 체계가 기후위험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고려해 유연성을 보장하면서도, 정량적 지표와 정성적 설명을 동시에 요구하도록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보고서의 구성은 질적 정보 중심의 두 개 테이블과 양적 정보 중심의 네 개 템플릿으로 구성돼 있다. 이사회 책임, 경영진 보고 체계, 전략적 의사결정 반영 여부, 배출목표 설정 및 성과 연동 여부 등은 정성적 공시 항목으로 분류되며, 산업별 온실가스 배출, 지역별 물리적 기후위험 노출, 건물에너지효율 수준별 모기지 포트폴리오 등은 정량적으로 집계하도록 했다.
주요 변화 중 하나는 ‘예측(forecast)’이라는 표현을 ‘목표(target)’로 바꾼 점이다. 단순 추정보다 구체적 행동계획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설계가 바뀌었다는 의미다. 또한 ‘물질성 평가와 관계없이’ 공시하도록 했던 초안의 표현은 ‘물질적인 경우에 한해’ 공시하도록 바뀌면서 바젤 III의 공시 원칙과 정합성을 맞췄다. 촉진배출(facilitated emissions) 관련 항목은 최종안에서 삭제됐다.
바젤위원회는 향후에도 이 프레임워크의 실행 상황과 기타 국제 기준의 시행 흐름을 살펴보며, 필요 시 개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기후위험이라는 특성상 단일 지표로는 모든 위험을 포착할 수 없다는 점도 인정하며, 이용자들은 정보의 한계와 함의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번 보고서 발표는 전 세계 금융기관들이 기후위험을 단순히 윤리적 책임의 영역이 아닌, 핵심적인 재무위험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공시 기준이 자율이라고 해서 대응을 미뤄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함께 내포돼 있다.
기후위험 공시를 둘러싼 국제 기준 형성이 본격화되면서, 한국 금융당국과 시중은행들도 이에 상응하는 전략 마련이 요구된다. 공시 양식 번역에 머무르지 않고, 이사회 수준의 리스크관리 체계 설계, 내부 시스템 정비, 기후 시나리오 분석 능력 확보 등 실질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내 은행, 기후 공시 대응 본격화… 아직은 ‘의지’보다 ‘외형’ 중심
이번 BIS의 기후위험 공시 프레임워크 발표는 국내 은행들에게도 구체적 숙제를 안겨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최근 주요 시중은행들은 이사회 내 ESG위원회를 설치하거나, 기후리스크 전담 부서를 신설하는 등 내부 대응 체계를 강화하고 있지만, 실제 공시 수준은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신한은행은 2022년부터 TCFD 권고안을 기반으로 기후정보를 공시하고 있으며, ‘넷제로 목표’ 달성을 위해 포트폴리오 전환 전략을 수립 중이다. KB국민은행 역시 자산운용 포트폴리오의 탄소배출량 측정 체계를 마련하고, 석탄 관련 신규 프로젝트 파이낸싱 중단 방침을 공식화했다. 하나은행은 자체적인 기후 시나리오 분석 모델을 개발해 포트폴리오 민감도 진단을 시도하고 있으며, 우리은행도 ESG 여신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위험산정 체계에 기후요인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BIS가 요구하는 수준의 정량 공시, 특히 ‘스코프 3’ 배출량 산정이나 부동산 담보 대출의 에너지 효율 정보 구분 등은 대부분 준비가 미흡한 실정이다. 전사적 차원의 기후 리스크 관리 통합 시스템 구축이나, 중장기 감축 목표의 검증 및 외부 공시 체계와의 정합성 확보 측면에서도 선진 금융기관 대비 과제가 적지 않다.
일부 은행은 아직도 ESG를 대외 커뮤니케이션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기후위험 공시를 전략·재무·리스크 관리를 아우르는 핵심 경영 이슈로 승격시키지 않으면, 향후 국제 자본시장에서의 평가와 조달 조건에서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BIS 보고서가 ‘자발적 공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국내 은행권에 실질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기준선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이상, 선제적 체계 구축과 내실 있는 대응 전략 마련이 시급하다. 단순한 표작성이나 선언적 목표 수립을 넘어서, 실제 리스크 반영 구조와 인센티브 시스템까지 정비하지 않으면 ‘공시의 정합성’은 오히려 리스크가 될 수 있다.
감독당국, 후속 규제 준비 중
금융당국도 이에 대한 대응체계를 정비 중이다. 금융위원회는 주요 금융지주사 및 시중은행을 대상으로 기후위험 관리 체계를 모니터링하고 있으며, 2026년부터 도입 예정인 지속가능 공시기준(K-IFRS S2)의 금융권 적용을 위한 이행 로드맵을 마련하고 있다. 현재는 IFRS S2와 바젤 공시 프레임워크 간 정합성 확보를 위한 사전 분석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향후 금융공기업과 대형은행부터 단계적 공시를 의무화하는 방안이 검토 중이다.
금융감독원은 ‘기후리스크 감독 프레임워크’ 시범 운영을 준비 중이다. 은행들의 스코프별 배출량 측정 능력, 기후위험 분류 기준, 기후데이터 활용 수준을 중심으로 한 내부 평가 모델을 개발하고 있으며, 자산건전성 평가나 자본적정성 평가에 기후위험 요소를 반영하는 방안도 중장기 과제로 설정했다.
국내 기준 측면에서는, 한국회계기준원과 금융감독원이 공동으로 개발 중인 K-IFRS S2 기준서가 2026년부터 본격 시행될 예정이며, 이는 국제 지속가능성 공시기준위원회(ISSB)의 S2 기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주요 상장 금융회사들은 온실가스 배출량, 기후리스크 노출, 대응전략 등을 포함한 기후정보를 재무공시와 함께 보고해야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은행별 기후리스크 내재화 모델도 점차 구체화되고 있다. 일부 은행은 기후리스크를 스트레스 테스트 시나리오에 반영해 신용리스크 민감도 분석을 시행하고 있으며, 자산별 탄소중립 달성 시나리오를 수립하고 있다. 특히 수익성 지표와 연계된 KPI에 기후위험 요소를 포함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으며, 내부등급법(IRB)을 적용 중인 은행들은 기후위험 요소를 반영한 위험가중치 조정까지도 중장기 과제로 고려하고 있다.
결국 BIS의 기후위험 공시 프레임워크는 자발적이라는 형식에도 불구하고, 국내 금융산업에 있어 실질적 준거 기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공시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공시가 금융회사의 리스크관리·경영전략·성과보상 체계 전반에 어떻게 연결되느냐는 점이다. 한국 금융권이 이러한 흐름을 단순히 외형적으로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제적 투명성과 대응력을 갖춘 실질적 대응주체로 전환할 수 있을지가 향후의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